UPDATE : 2019.1.18 금 17:26 ㆍ 구독 Subscribe Now
상단여백
HOME 연재 여행
[한겨울 산티아고 순례길 18] 밥을 해먹는 행복

밤새 뒤척이는데 비바람 소리가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아, 드디어 오늘은 우중보행이구나! 직감 합니다.

새벽에 출발하기는 불가능해서 느지막이 준비해 나서니 그래도 여덟시. 아직 어둑하지만 비는 그쳤고 하늘은 그다지 무겁지 않습니다. 각오를 단단히 하고 중간에 멈출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며 출발합니다.

다행히 오전에 잠깐 비가 뿌려 우의를 입어야 했을 뿐 종일 구름과 함께 걸었습니다. 발의 상황이 한 시간에 한번은 신발과 양말을 벗어주어야 하는데 비가 오면 난감해집니다.

한참을 씩씩하게 걷다가도 갑자기 기운이 떨어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러면 만사가 귀찮아지고 짜증이 일어나지요. 그럴 때 마을을 만나면 동네 바(Bar)에 들어가 1유로 하는 까페(커피) 한잔을 시킵니다. 솔로(블랙)로요.

물론 화장실도 가고 와이파이도 쓰구요. 그렇게 진한 에스프레소 한 모금을 넘기고 나면 입 안 가득 커피향이 맴돌고 지치고 가라앉았던 몸에 활력이 가득해집니다.

진짜 사소한 삶의 기쁨입니다. 비 오는 흐린 날의 커피는 더 그러합니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그렇게 길 위에서 걸음과 만나고 길과 만나며 오다보니 오늘도 해가 지고서야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어제 빨래도 했겠다 비를 피할 데만 있으면 노숙도 문제없으니 혹시 문을 연 알베르게가 있는지 마을을 천천히 돌아봅니다.

다행히 도네이션(가격이 정해져 있지 않고 자발적인 기부)으로 운영하는 시립 알베르게가 있어서 들어갔더니 스페인 형제 둘이 미리 와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거실의 벽난로 말고는 난방이 안 되고 샤워실도 거의 개방되어 있는 수준이지만 노숙을 해본 나로서는 고맙고 고마울 뿐입니다.

유럽 사람들은 내외를 잘하지 않아서, 남녀가 샤워실에서 벗은 채 마주치거나 남녀 공용 침실에서 속옷까지 갈아입는 것도 크게 개의치 않습니다. 유럽의 호스텔을 사용하면서부터 알게 된 사실이지요. 나만 눈 둘 데가 없지 상대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알베르게를 확인하고는 바로 슈퍼마켓으로 가서 눈에 보이는 대로 쌀과 양파, 마늘, 햄과 새우를 골라 옵니다. 물론 내일 비상식량이 될 계란과 감자도 사구요. 혼자 다니기 시작하면서 며칠 먹지 못하고 걸었더니 도저히 안 되겠습니다.

나만을 위한 밥상을 준비합니다. 그런데 너무 욕심을 부렸나 봐요. 밥도 많이 하고 재료도 많이 사구요. 역시 배고플 때 장을 보면 안 됩니다.


어디나 그렇지만 여기 까미노에서도 음식을 한번 해 먹어 보면 밖에서 사먹는 게 잘 안됩니다.일단 6유로 정도의 장을 보면 저녁과 아침과 점심 도시락까지 준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값싼 순례자 메뉴도 10유로, 커피와 빵과 잼인 아침이 3유로, 점심을 사먹으면 샌드위치와 음료도 5유로는 하니 주방 형편만 되면 장을 봐서 밥을 해먹는 것이 낫습니다.

특히 ‘밥순이’ ‘밥돌이’들은 더 그렇지요. 하여튼 오늘 냄비밥도 성공했고, 햄 새우 야채 볶음도 기가 막혔습니다. 혼자 먹기 아까웠지요.


오늘은 커피 이야기에서 먹는 이야기로 마치네요. 구름 머금은 하늘과 함께 동행한 하루였습니다. 삶 가운데 있는 사소한 기쁨으로 행복을 만끽하기를요! 그것이 길의 진리입니다.

(20151214 #산티아고 18일 345.5km 레디호스 - 엘 부르고 라네로)

오동성  eastsain@chol.com

<저작권자 © 미디어숨,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동성 eastsain@chol.com
목사, 2004년 캐나다 토론토로 이주해 목회와 공동체 일을 해왔고 지금은 토론토의 한인 양로원에서 어르신들의 노년을 섬기며 여행과 명상, 일상생활을 통해 길 위에서 하늘을 보고 나를 찾아가는 안내를 하며, 2014년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후 <세월호를 기억하는 토론토 사람들>과 함께 유가족과 연대하여 세월호 진상규명과 그를 통한 안전한 사회를 세우는 일에 힘을 다하고 있다.
· 저서 : 지금 여기 그리고 당신과 함께, 다른 우리
· 역서 : 칼릴 지브란 예언자, 나마스테
https://www.facebook.com/eastsain

오동성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