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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다이어리 26] 쿠바의 성인식… 소녀는 예뻤다

그녀, 아니 그 소녀라고 해야 하나? 뭐라고 부르든, 그녀를 본 것은 휴양도시 바라데로의 어느 한적한 공원에서였다. 그때가 1942년이었다던가? 돈이 넘쳐 주체하지 못하던 어느 지주가 자신의 아내를 위해 만들어줬다는 공원은 크고 아름다웠다. 산닭들은 저희들의 세상에서 작은 알을 낳고 부화시키고 병아리들은 어미닭을 부지런히 따라다니며 세상사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계절을 잊은 나무들은 푸른 잎을 자랑하고 호수의 물은 징그러울 정도로 파랗게 빛났다.

처음에는 영화 촬영 현장인 줄 알았다. 남자 배우는 보이지 않았지만 검은 옷 일색으로 차려입은 여자 배우가 검은 양산을 쓰고 카메라 앞에 서서 온갖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영화 촬영 현장을 처음 보는 것도 아니고, 또 쿠바까지 가서 촌놈 노릇을 하기 싫어서 내처 걸었지만, 시선까지 두고 간 건 아니었다. 멀리서 봐도 꽤 예쁜 배우였다.

나무그늘에 앉아서 음료수 대신 모히또를 한 잔 마시는데, 촬영팀이 내가 앉은 근처로 옮겨 전을 펼쳤다. ‘배우’는 보석이 주렁주렁 매달린 분홍색 옷으로 갈아입은 뒤였다. 검은 옷을 입었을 때는 성인 티가 물씬 나더니 환한 옷으로 갈아입으니 훨씬 어리고 화사해 보였다. 더 이상 모른 체 할 수 없었다. 누구든 붙잡고 물어보는 수밖에.

“영화 촬영하는 거예요?”

질문을 받은 사람은 웬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듯 웃기부터 했다. 내가 촌놈 짓을 한 건가? 하지만 영화 촬영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게 촬영팀 자체의 규모가 엄청났다. 카메라나 반사판 같은 장비들이야 그렇다고 하더라도 의상담당에 미용담당에, 스태프 역할을 하는 것 같은 여자들도 몇 있었다.(나중에 알고 보니 엄마, 동생 등 가족이었다.) 한눈에도 고가로 보이는 클래식 카도 소품으로 대기하고 있었다.

“영화요? 하하! 성인식 촬영을 하는 거예요.”
“성인식? 성인식이라면… 저 친구가 몇 살인데요?”
“열다섯 살이에요. 쿠바에서는 열다섯 살 되는 해 생일 날 성인식으로 하거든요.”

아! 그렇구나. 영화 촬영이 아니라, 성인식을 하는 것이었구나. 가만? 그런데, 저 친구가 열다섯 살이라고? 아무리 봐도 스무 살은 넘은 것 같았다. 열다섯이면 중학교 3학년쯤 됐다는 것인데, 에이! 설마!! 아무리 조숙하다고 해도 열다섯은 너무 했다.

괜한 소리가 아니라 사진을 보면 누구나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디 저 얼굴이 열다섯 살이란 말인가. 하지만, 본인들이 그렇다는데 내가 뭐라고 하랴. 설명해준 사람 말대로 쿠바에서는 열다섯 살이면 성인식을 한다. 성인식은 스페인어로 낀 세아네라(quinceanera, 15세 행사라는 뜻)라고 한다. 쿠바에서는 이때를 인생에서 가장 예쁜 나이로 본다. 가장 예쁜 날을 기념하기 위해서 성대한 성인식을 열어주는 것이다. 그리고 성인식을 치른 여성은 자유롭게 결혼할 수 있다고 한다.

성인식을 하는 소녀는 예뻤다. 아니, 환하다는 표현이 더 나을 것 같다. 그 나이에는 누구나 예쁘니까. 예쁘다고 다 환한 것은 아니니까. 그녀는 세공 전의 보석처럼 조금 수줍으면서도 밝게 빛났다. 머리 모양을 바꾸는 동안 낯선 이방인이 카메라를 들이대는데도 밝게 웃었다. 아니, 일부러 포즈를 취해주기도 했다.

행복해보였다. 한 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날이니 행복하지 않을 수 있나. 그녀를 따라다니며 시중을 드는 젊은 엄마도, 오늘은 조금 질투가 나지만 언젠가 성인식을 치룰 어린 동생도 행복해 보였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내 생각은 또 엉뚱한 곳으로 달리고 있었다. 이 나라의 모든 아이들이 성인식을 할까? 가난한 아이들에게도 저렇게 화려한 드레스와 화장이 가능하고 카메라가 따라다니는 날이 있을까? 사회주의 국가라고 해서 신분이나 빈부의 격차가 없는 것은 아닐 테니…. 따지고 보면 괜한 걱정이다. 여행을 하면서까지 빈부가 어떠니 신분이 어떠니 따질 건 뭐람. 한 소녀의 행복한 모습을 보고 나도 행복해지면 그만인 거지. 자꾸 가지를 치려는 상념을 얼른 잘라버렸다.

모히또를 한 잔 더 마시면서, 이번엔 아름다움에 대해 오래 생각했다. 지금 저 소녀를 온통 빛내주는 저 아름다움은 얼마나 영속성을 가질까. 초 단위로, 아니 그보다 훨씬 세밀하게 나뉘어 달음질치는 시간의 심술을 조금 먼저 알아버린 나는 소녀가 조금 가엾어졌다. 세상에 시들지 않는 꽃은 없더라. 일찍 핀 꽃이 일찍 시들더라. 금강석처럼 단단해 보이던 사랑의 맹세조차 먼지처럼 흩어지더라.

낯선 나라의 한낮, 낮술에 취한 여행자 하나가, 그 순간이 마냥 행복한 소녀가 알면 욕 한 번 크게 하고도 남을 생각에 푹 빠져 있었다.

이호준  sagang@mediasoo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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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준 /시인.여행작가.칼럼리스트 sagang@mediasoom.co.kr
<사라져가는 것들 잊혀져가는 것들><클레오파트라가 사랑한 지중해를 걷다><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안부><자작나무 숲으로 간 당신에게> <나를 치유하는 여행> 등의 여행서, 산문집과 캘리그래피 시집 <사랑은 저 홀로 아름답고>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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