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 2019.2.1 금 14:28 ㆍ 구독 Subscribe Now
상단여백
HOME 연재 여행
[한겨울 산티아고 순례길 17] 길에 나를 맡기다.

레온 지방에 들어서니 대평원이 펼쳐집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지평선, 그리고 길입니다.
40km가 다되는 그 길을 종일 걸었습니다.
그러나 끝나지 않는 길은 없습니다.
그 먼 길이 끝나니 왜 이리 아쉬운지요.
해질 때까지 아니, 밤새 걸어도 좋았을 길입니다.
노숙도 해 봤겠다, 이제 겁나는 것이 없습니다.
길을 가다보니 저기서 자면 좋겠다 하는 곳이 보이네요.
아무도 없는 길에 앉아 지평선을 마주하고 명상하면 내 안이 가득합니다.

4시간, 5시간을 걸어도 지평선이던 그 길이 불현 듯 왜 그리 마음에 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길은 늘 내 생각을 넘어서 있습니다.
'이 길 진짜 맘에 들어!' 그러면서 걸으니 길하고 연애를 하네요.
그렇습니다.
길을 가는 사람은 길에 나를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거기서 할 수 있는 것은 길에 서 있고 길을 가는 것뿐이지요.
삶도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삶에 나를 맡기고 내게로 찾아온 삶을 사는 겁니다.

오늘은 일찍 길에 서고 싶어서, 아침 6시부터 일어나 계란 삶고 찬밥 삶아서 어제 만들어 놓은 야채볶음으로 배를 든든하게 채우고 12시간을 길 위에 있었네요.
오늘 길 참 행복했습니다.
컨디션도 좋구요.

그리고 도착한 알베르게.
사실은 4km정도 더 가고 싶었는데 해가 지고 발에게 미안해서 들어선 알베르게인데 스페인 까미노에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시설이 좋은 겁니다.
호텔 수준입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며칠 못한 빨래를 돌리고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하고 나니 날아갈 것 같습니다.
와이파이도 빵빵하구요
아쉬운 것은 작은 마을이라 근처에 상점이 없어서 저녁 준비를 못한다는 것.
아침에 한판 삶은 계란과 미숫가루로 저녁을 대신합니다.
그래도 좋습니다.

지난 밤 생생하고 긴 꿈을 꾸었습니다.
까미노에 온지 보름만에 까마노를 잊은 꿈이었지요.
꿈에서 깨면서 여기가 어디지 했으니까요.
그간은 늘 알베르게라는 것을 자각하면서 눈을 떴었는데 말입니다.
꿈에 모교인 장신대에 있었습니다.
꿈에 만나 인사한 동기들 선후배들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이형기 선생님이 강연을 하셨고 우리는 모두 경청을 했지요.
근데 신기한 것은 신대원 시절 불량학생이던 내가 선생님의 한 말씀 한 말씀을 정성으로 메모하고 있는 겁니다.

어제는 난방도 안되고 인터넷도 안되고 세탁도 할 수 없는 알베르게에 드는 바람에 성경을 읽다가 일찍 잠이 들었는데 그래서 신학교 시절로 돌아갔나 봅니다.
세상에 성경을 읽다가 잠이 들다니! 영광입니다.

오늘 밤도 길에 나를 맡깁니다.
비가 옵니다.

(20151213 #산티아고 17일 378.9km 뽀블라치온 데 깜뽀스 - 레디호스)

오동성  eastsain@chol.com

<저작권자 © 미디어숨,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동성 eastsain@chol.com
목사, 2004년 캐나다 토론토로 이주해 목회와 공동체 일을 해왔고 지금은 토론토의 한인 양로원에서 어르신들의 노년을 섬기며 여행과 명상, 일상생활을 통해 길 위에서 하늘을 보고 나를 찾아가는 안내를 하며, 2014년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후 <세월호를 기억하는 토론토 사람들>과 함께 유가족과 연대하여 세월호 진상규명과 그를 통한 안전한 사회를 세우는 일에 힘을 다하고 있다.
· 저서 : 지금 여기 그리고 당신과 함께, 다른 우리
· 역서 : 칼릴 지브란 예언자, 나마스테
https://www.facebook.com/eastsain

오동성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