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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 산티아고 순례길 15] 촛불을 꺼라!

어제 저녁 나무 박스로 만든 침상에서 여유로이 명상에 들었습니다. 노숙을 하니 춥고 배고프고 씻지 못하는 것이야 그런대로 참을만한데 스마트폰을 충전을 시킬 수 없고 인터넷을 쓸 수 없는 게 큰 애로네요. 그것이 없고 보니 해가 지고는 자기 전까지 시간이 너무 많습니다.

이럴 때는 내가 명상을 할 수 있고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그러면 시간을 내 마음대로 쓸 수 있지요. 그 때만은 시간이 멈추니 말입니다.숨과 함께 하루가 천년이고 천년이 하루입니다.

명상에 들었다 눈을 뜨니 하늘에 별이 총총합니다. 아, 나의 스테파네트는 어디에 있을까요? 난 별만 보면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본 알퐁스 도데의 스테파네트가 생각납니다. 스페인 낯선 마을에서 별을 보며 이렇게 님을 그리네요. 탄성을 올리고 감사하게 침낭 속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잠시도 못가 서늘한 기운이 지나가면서 안개 바람이 몰려오네요. 축축한 한기가 온 몸을 감쌉니다. 자연히 제일 추웠던 기억들이 지나갑니다.

대학 시절 급하게 밤샘 농성을 하게 되었던 날 담요 한 장 없이 추위에 떨었던 기억, 전방에 입소해서 매복근무를 서며 추웠던 기억, 겨울 지리산행 길에 난방이 안 되는 얼음 같은 연하천 산장에서 날이 밝기만을 기다리던 기억, 뼛속 깊이 한기가 지금도 스미어 옵니다.

그래도 자다 깨다 하며 아침을 맞이할 수 있음이 얼마나 고마운지요. 이제 어떤 숙소도 고마움입니다. 순례자는 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아침 6시가 되자 성당 종이 울리고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짐을 챙기고 자리를 정리해 길을 나섭니다. 날이 밝아오려면 2시간은 더 있어야 하지만 침낭 속에서 떨고 있는 것보다 움직이는 것이 낫지요.

마을을 벗어나 안개와 어둠 속에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길을 홀로 갑니다. 홀로라서 갈 수 있는 길이지요. 길이 그렇습니다.

손전등으로 안개 속을 비추며 한걸음씩 가다보니 김흥호 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촛불을 꺼라!"

앞이 보이지 않는 이유는 촛불을 켜고 있기 때문이라 하셨습니다. 촛불 때문에 멀리 볼 수가 없는 거지요. 촛불을 켜면 눈앞은 보여서 돌부리는 피할 수 있지만 멀리 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촛불을 끄니 먼 길이 보입니다. 고요가 찾아오지요. 안개도 보이고 멀리 별빛도 보입니다. 들리지 않던 숨소리도 들립니다. 촛불은 안전하게 느껴지지만 그것 때문에 가려지는 것이 많지요.

촛불은 내 생각입니다. 그 촛불을 끄고 나면 이렇게 날 기다리는 밝은 곳이 있네요. 나는 촛불을 끄고 다시 내 짐을 지고 길을 떠납니다. 길이 있어 길을 갈 수 있어 참 좋습니다.

노숙을 했으니 세수며 양치도 못했을 뿐 아니라 아침도 제대로 먹지 못했지요. 그런데 오늘따라 만나는 마을마다 바(Bar)나 식당이 모두 문을 열지 않았습니다. 스마트폰도 충전을 시키지 못해 사진도 찍지 못하고 하루를 보낼지도 모릅니다.

다행히 창문을 열어놓고 창가에 앉아 있는 동네분과 눈이 마주쳐서 인사를 나누고 스마트폰 충전을 부탁합니다. 마음씨 좋은 분이 흔쾌히 승낙해주어 잠시 쉬며 스마트폰을 충전하였지요.

토론토부터 미숫가루를 준비해 온 것은 참 잘했습니다. 미숫가루가 없었으면 꼼짝 못하고 굶었을 텐데 덕분에 응급상황에서 요긴하게 대처할 수 있어 고마웠습니다.

그렇게 걷고 걷다보니 저 앞 언덕 위에 마을이 보입니다. 자동차가 다니는 길과 합쳐진 까미노를 걸으며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는 마을을 느끼는 맛이 남다릅니다.

생각을 넘어 내 걸음으로 만나는 은혜이지요. 촛불을 끄면 길이 보입니다.

(20151211 #산티아고 15일 446.4km 라베 데 라스 칼짜다스 - 가스트로헤리츠)

오동성  eastsain@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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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성 eastsain@chol.com
목사, 2004년 캐나다 토론토로 이주해 목회와 공동체 일을 해왔고 지금은 토론토의 한인 양로원에서 어르신들의 노년을 섬기며 여행과 명상, 일상생활을 통해 길 위에서 하늘을 보고 나를 찾아가는 안내를 하며, 2014년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후 <세월호를 기억하는 토론토 사람들>과 함께 유가족과 연대하여 세월호 진상규명과 그를 통한 안전한 사회를 세우는 일에 힘을 다하고 있다.
· 저서 : 지금 여기 그리고 당신과 함께, 다른 우리
· 역서 : 칼릴 지브란 예언자, 나마스테
https://www.facebook.com/easts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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