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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 가는 것들27] 사진사

마누라의 심정을 아주 모르는 건 아니다. 돈도 못 벌면서, 아침마다 구부정한 어깨로 집을 나서는 남편이 맘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일 나가는 사람의 뒷꼭지에다 비수를 들이댈 건 뭐란 말인가. 아무리 별 볼일 없는 가장이라고 해도 그러는 게 아니다. 아, 그리고 뭐? 돈도 안 되는 거 때려치우고 단풍놀이나 가자고? 서천 쇠가 웃을 일이지. 언제부터 우리가 단풍놀이나 하고 살았다고…. 아침부터 낌새가 이상하긴 했다. 멀쩡하게 잘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우더니 사업인지 장산지 하겠다고 지 에미를 졸라대는 큰놈이 화근이었을 것이다.

녀석은 어젯밤에도 지 에미랑 뭔가 쑤근거리다 집을 나갔다. 집이라도 처분해야 할 판이니, 밑돈 대주는 게 어디 제 녀석 말처럼 쉬운 일인가. 다른 날 같으면 밥상머리에 앉아서 옆집 강아지 새끼 낳은 얘기라도 늘어놓던 마누라가 오늘따라 주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뭔가 단단히 꼬여있는 게 틀림없었다. 결국 문을 나서는데 봇물처럼 터지고 말았다. "그 돈도 안 되는 거 때려치우고…." 허, 아무리 세상이 바뀌었다고, 마누라쟁이까지 이러는 데야 하늘이 노랗게 보일 수밖에. 고리눈을 부릅뜨는 걸로 대답을 대신하고 나왔지만, 내내 속이 편치 않다.

오늘따라 공원으로 올라가는 길이 유난히 가팔라 보인다. 담배끊은 지 여러 해 됐건만 아직도 숨이 그르렁거리고 가슴이 답답하다. 하지만 다시 내려간다고 해도 갈 곳도 없다. 죽으나 사나 내 자리는 이 공원이다. 매점에 맡겼던 장비를 찾아 설치하고 노란 완장을 찬 뒤 '사진촬영' 깃발을 내건다. 카메라가 눈앞에 보이니 울렁증이 좀 가라앉는다. 접이식 의자를 펴서 쭈그리고 앉는다. 이런 땐 담배로라도 헛헛한 속을 달랬으면 하는 생각이 굴뚝같지만 참을 수밖에 없다. 사람들에게 건강 때문이라고 했지만, 기실 담뱃값을 대기에 벅차게 된 뒤로 담배를 끊었다.

담배야말로 공휴일이 없으니 아껴 피운다고 해도 한 달에 7~8만원이 후딱 들어간다. 매점의 김씨나 가끔 들락거릴 뿐 공원에 사람은 거의 없다. 비둘기 몇 마리가 뭔가 기대하는 눈길로 주위를 맴돈다. 내 주머니에서 좁쌀이라도 나오기를 바라는 것이겠지만 오늘은 같이 놀아줄 흥이 안 난다. 평일이라 그런지 올라오는 사람이 없다. 하긴 사람이 있든 없든 별 상관이 없어진지 오래다. 누구 하나, 매점 옆에 앉아있는 늙은 사진사를 눈여겨보는 사람이 없다. 가끔 가다 눈 어둔 시골 노인네들이 와서 기웃거려 보지만 거기가 끝이다.

내가 내내 공원의 늙은 사진사로 살아온 건 아니다. 메뚜기도 오뉴월이 있었듯이 내게도 좋은 시절은 있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잘 나가는 '행복사진관' 사장이었다. 사진을 찍게 된 건 군대서부터였다. 정말 우연한 계기였다.

사령부 정훈참모실 소속 사진병이 사고로 후송을 가게되면서, 사회에서 사진기 몇 번 만져봤다는 이유로 졸지에 사진병으로 차출되었다. 군의 사진병이 날마다 할 일이 있는 건 아니었다. 남는 시간은 카메라를 분석하고 찍어보는데 할애할 수 있었다. 덕분에 제대할 무렵에는 제법 능숙한 사진병이 되어 있었다. 제대하면 카메라와는 인연을 놓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취직자리를 여기저기 찾아봤지만 고졸의 병장출신 젊은이를 쓰겠다는 곳은 나타나지 않았다. 여기저기 이력서를 뿌리고 다니던 참에 모 건설회사에서 중동의 공장현장에 파견할 사진사를 뽑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운이 좋았던지 나는 바로 고용되었고 제법 괜찮은 대우를 받으면서 열사의 나라를 누빌 수 있었다. 국내에 돌아왔을 때는 꽤 많은 돈이 모아져 있었다. 나는 미련 없이 회사에 사표를 내고 사진관을 열었다. 그동안 모은 돈을 몽땅 투자했다. 사진관은 꽤 잘됐다.

내겐 참 좋은 시절이었다. 그 당시 이 나라의 먹고 살만한 백성들은 계기만 있으면 사진관을 드나들었다. 아이 백일 때도 돌을 맞이해서도 사진을 찍었다. 그뿐인가. 아이가 학교에 들어갈 때도 졸업할 때도 사진관을 찾았다. 그 아이가 커서 군대를 갈 때도 가족들이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머리를 깎기 전에 찍어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재미가 쏠쏠할 수밖에 없었다. 자리가 잡히면서 결혼도 하고 아이들도 낳았다.

그 때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것 같았다. 세월은 평탄을 가장하고 그렇게 흘렀다. 하지만 그 누구도 영원히 행복할 수 없다는 건 만고의 진리가 아니던가. 어느 날인가부터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지기 시작하더니 종국에는 사람보다 파리가 더 많아졌다. 처음엔 내가 뭔가 잘못해서 그런가 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다른 사진관들도 죽을 쑤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깨달은 건 세상이 바뀌었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언제부터인지 사진관에 가는 것에 흥미를 잃어버렸다. 누구나 사진관에서 찍던 돌사진마저도 집에서 해결했다. 자동카메라의 급속한 보급은 온 국민에게 사진관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잊게 했다. 더구나 행복사진관 같은 아날로그식 사진관은 주민등록증을 처음 내는 고등학생 외에는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 기류에 결정적으로 기름은 끼얹은 것은 디지털카메라의 등장이었다. 디카가 등장하면서 사진을 찍히는 시대는 찍는 시대로 바뀌었다. 한마디로 광풍이었다. 젊은이들의 호주머니에는 하나같이 디카가 들어 있었다. 필름 값이 들지 않으니 아무 곳에서나 셔터를 눌렀다. 그래서 이 땅의 사진사는 모두 사라지고 사진가만 남게되었다. 전국의 행복사진관들은 초토화되고 '스튜디오'라는 세련된 이름을 가진 곳만 화려한 간판 아래 명맥을 이었다. 가게세를 내기도 힘들어졌다. 눈물을 머금고 행복사진관의 간판을 내렸다.

나는 아직 젊은 데 세상은 내가 서 있을 자리를 허락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나마 결혼식 일거리라도 쫓아다녔지만 날이 갈수록 그 기회마저도 줄어들었다. 그래서 시작한 게 공원의 관광사진사였다. 그나마 관광지로 꽤 알려진 공원이라 찾아오는 사람은 제법 많았다. 이 공원에서 전부터 일하던 사진사가 친구였다. 그는 평생을 이 공원에서 카메라와 함께 보냈다. 그도 한 때는 꽤 재미를 봤다. 그런 그가 아들 따라 미국으로 간다고, 선심 쓰듯 자리를 내주었다. 고맙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관광사진사야말로 좋은 시절이 다 간 뒤였다. 사람들은 신발은 잊어버려도 디카를 잊고 공원에 오는 법은 없었다.

피붙이처럼 아끼던 필름카메라를 장롱에 넣어두고 디지털카메라를 구입했다. 느낌이든 색감이든 모든 게 낯설었지만 정을 붙이는 수밖에 없었다. 즉석에서 사진을 뽑아주면 경쟁력이 생길까 해서 포토프린터도 샀다. 하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사람들은 나를 구시대의 유물 보듯 하며 자기들끼리 사진을 찍었다. 더 이상 이 나라에는 내 카메라 앞에 설 사람이 없는 듯 했다. 어쩌다 중년남녀를 꼬여내 카메라 앞에 세워보지만 가뭄에 콩 나기를 기다리는 게 나을 듯 했다. 아내는 내가 공원에 나가는 걸 탐탁지 않게 여겼다. 구차하게 공원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게 싫다는 것이었다. 내가 듣기엔 배부른 소리였다. 언제부터 그리 잘 살았다고….

집안에 들어앉아 있어도 따로 할 일이 없었다. 어쩌다 집에 있으면 되레 안절부절이었다. 평생 사진만 찍어온 내가 뭘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카메라가 목에 걸려있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 찍을 대상도 친구도 없지만 난 오늘도 양지바른 곳에 앉아 카메라와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눈다. 어차피 가는 세월과 바뀌는 물정이야 어쩌겠는가. 장롱에 고이 모셔둔 내 낡은 카메라처럼, 나도 머지 않은 날에 차가운 땅에 묻히고 모두의 기억에서 사라져 갈 운명인 것을….
*사진속의 인물들은 이 글의 내용과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사강  sagang@mediasoo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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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강 / 여행작가 sagang@mediasoo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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