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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해에서 만난 어부 이스마일
흑해의 어부 이스마일. 고기가 안 잡혀도 활짝 웃는다.

“요즘은 함시가 거의 안 잡혀요. 그래도 혹시나 싶으면 내일 새벽에 그물 친 곳으로 가봅시다.”

흑해의 ‘오프’라는 바닷가 마을에서 만난 선주조합장 이스마일은 험악해(?) 보이는 인상과 달리 마음이 무척 따뜻했다. 배를 타고 싶으면 새벽 5시까지 오라는 것이었다. 나는 <세계 테마기행>이라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 출연 중이었고, PD와 카메라 감독은 그 지방 사람들의 힘의 원천이자 흑해서만 나는 물고기인 함시 잡는 모습을 영상에 담고 싶어 했다. 그래, 설마 한 마리도 안 잡히기야 하겠어? 일단 부딪혀보는 거야. 이스마일과 단단히 약속을 하고 오프를 떠났다.

새벽 4시. 휴대전화 알람이 울리자마자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스마일과 함시잡이 배를 타러가기로 한 날이었다. 어두운 길을 달려 오프로 향했다. 부두에 도착하니 ‘어부대장’ 이스마일이 나와 있었다. 전날은 멋진 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아침에는 어부들이 입는 허름한 작업복 차림이었다. 외모는 암흑가 보스를 연상시키지만 마음은 비단결처럼 부드러운 남자. 이스마일이 우리 일행을 어부 숙소로 안내하더니 꽤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다. 함시 잡을 자신이 없으니까 안 돌아오는 거 아냐? 농담이 오갈 만큼 시간이 지나서야 새벽빛을 등에 진 그가 휘적휘적 나타났다. 손에는 빵 봉지가 들려있었다. 그 새벽에 우리에게 대접할 빵을 사기 위해 먼 곳까지 다녀온 그의 마음이 가슴에 따뜻하게 얹혔다.

흑해의 작은 바닷가 마을 ‘오프’.

빵을 배불리 먹고 차이까지 마시고나니 아침햇살이 문 앞까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바닷물 위에서 연신 자반뒤집기를 하는 황금빛 물비늘이 찬란했다. 이스마일이 어구 몇 가지를 갖춰 배로 가더니 시동을 걸었다. 배는 별로 크지 않았다. 두세 명이 타고 가까운 바다에 나가 조업하기에 적당한 규모였다. 드디어 출항. 시계가 6시 5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배가 천천히 부두를 밀어내며 바다로 나아갔다. 흑해 특유의 검푸른 물이 연신 몸을 뒤챘다.

한참 달리던 배가 속력을 줄이더니 한 지점에 멈춰 섰다. 배를 세우고 선실에서 나온 이스마일이 바다에 닻을 던졌다. 설산이 저만치 보이는 걸 보니 그리 먼 바다까지 나온 것 같지는 않았다. 그물의 위치를 알려주는 스티로폼 부표들이 한가롭게 출렁거리고 있었다.

준비가 끝나자 이스마일이 천천히 그물을 당기기 시작했다. 그물을 끌어올리기 쉽게 배의 뒷부분, 즉 고물에 철제 기둥을 세우고 도르래를 달아놓았다. 그물이 조금씩 올라오면서 카메라와 사람의 시선이 집중됐다. 헌데, 이게 웬일? 정말 물고기가 하나도 안 보였다. 그물에는 해파리만 잔뜩 들어있었다. 함시는 그렇다고 쳐도 명색이 바다인데 다른 고기라도 잡혀야 하는 게 아닌가? 한참 끌어올리자 손가락만한 잡어 몇 마리가 가뭄에 콩 나듯 따라 나올 뿐이었다.

그물이 모두 올라왔는데도 물고기는 작은 그릇 하나를 채우지 못했다. 개천으로 천렵 나온 것도 아니고. 내가 되레 무색하고 미안해졌다. 이스마일의 설명을 들어보면 함시 가 안 잡힐만한 이유가 있었다. 우선 바다에 고등어가 많은 해는 함시가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 이유로는 바다와 인접한 차밭에 치는 농약이 바닷물을 오염시켰기 때문이라고 했다. 세 번째는 일제 첨단 전자장비가 들어오면서 함시의 치어까지 몽땅 쓸어버렸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부대장 이스마일은 위축되는 기색이 없었다. 최선을 다했는데도 안 잡히는 걸 사람의 힘으로 어쩌겠느냐는 표정이었다.

“이 지경인데 내일 또 나올 겁니까?”
“그럼요. 바다가 있는 한 나와야지요. 나는 어부잖아요.”

지천이었다는 물고기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고등어가 많아지고 차밭에 농약을 살포하고 첨단장비가 쏟아져 들어왔다는 것을 감안해도 정도가 너무 심해 보였다. 결과가 그럴 것이라는 사실을 모를 리 없는 이스마일이, 굳이 다큐 촬영팀을 바다까지 데려간 건 심각한 현실을 누구에겐가 호소하고 싶어서였을지도 모른다. 어부대장 이스마일의 단단한 미소가 아니었다면, 그물을 다시 바다에 맡기고 돌아오는 길이 정말 쓸쓸했을 뻔한 아침이었다.

육지에 올라와서도 이스마일이 했던 말이 자꾸 귓전을 맴돌았다. “바다가 있는 한 나와야지요. 나는 어부잖아요.” 여행은 살아있는 교과서다. 바다에서는 어부가 곧 스승이다.

사강  sagang@mediasoo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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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강 / 여행작가 sagang@mediasoo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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