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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꺼지지 않는 ‘루시아 소녀의 촛불’

스칸디나비아 반도! 아주 아주 오래 전, 어떤 사람들이 이 춥고 거친 동토의 땅에 처음으로 둥지를 틀었을까? 그들이 누구였던 간에, 해가 지지 않는 여름은 그렇다 치더라도 해가 뜨지 않는 어둡고 긴 겨울을 지내는 것은 정말 공포스러웠을 것이다. 이 계절을 넘겨 살아남을 수 있을까? 다시 따뜻한 계절이 올까? 온다면 얼마나 기다려야 올까?

이 공포를 물리치는데 가장 유효했던 도우미들은 바로 스칸디나비아 북유럽 신화에 여러 신들이었다. 동토의 땅에 살던 그들의 바람, 이상향이 무엇이었는지를 보면 그들에게 무엇이 부족했는지를 알 수 있다. 깊고 추운 겨울 한복판, 그들은 굶주림에 시달리고 때때로 사나운 짐승들에게 찢겨 죽임을 당했다.

그래서 그들에게 신들의 세상은 이와는 정반대로 밝고 따사로운 햇살과 절대 바닥나지 않는 풍요로운 먹거리로 가득 차고, 상처가 나더라도 바로 치유되는 신비한 요술이 가득한 파라다이스여야 했다. 북유럽 신들은 특히 상이 떡 벌어지는 화려한 잔치를 많이 벌이는데, 그 속에서 역설적으로 이 이야기를 지어낸 이들의 배고픔을 절절이 느낄 수 있다. 그래서인지 북유럽신화에는 풍요와 농업, 전쟁을 관장하는 신들이 많다.

더 이상 추위와 어둠이 생존을 위협하지 않고, 봄이 언제 온다는 걸 잘 아는 지금도 북유럽인들은 간절히 밝은 봄을 기다린다. 2년 전 겨울의 초입인 11월, 내가 사는 스웨덴 남부 도시 말뫼의 한 달 일조량은 2시간뿐이었다. 나는 빛을 그리워하는 이들의 마음을 절절하게 이해한다. 이들의 빛에 대한 갈망은, 오래 전부터 밤이 가장 어둡고 긴 날이라 여겨온 12월 13일 “루시아의 날”을 기념하는 전통 속에 잘 나타나 있다.

‘루시아 Lucia’는 시칠리 섬의 시라쿠스에서 태어나 304년,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박해로 죽은 성녀이자 맹인들의 수호성인이다. 그녀의 이름에는 라틴어 어원을 지닌 ‘빛 lux’이란 뜻이 있다. 빛의 성녀 루시아를 기리는 스웨덴의 ‘루시아의 날’ 행사는 주로 학교 단위로 치러지기 때문에 국가행사라기 보다 학교행사라는 느낌이 더 많이 든다. 루시아 역할을 하는 소녀는 놀이방에서부터 유치원을 거쳐 고등학교까지, 각 학교별로 경쟁을 통해 뽑히고, 시 단위로는 더 치열한 경쟁 속에서 선발된다.

며칠 전 12월 13일, 아이들의 학교에서 진행하는 ‘루시아의 날’ 행사에 다녀 왔는데, 진행 과정은 이랬다. 흰 가운에 붉은 허리띠를 두른 루시아 소녀가 무거운 촛불 화관을 쓰고 기차 놀이하듯 촛불 한 개씩을 든 소녀들을 거느리며 행사장에 천천히 걸어 들어와 무대 위에 선다. 그러면 그 중 한 소녀가 어둠을 몰아낸다는 루시아 노래를 부르고, 열심히 준비한 흔적이 별로 보이지 않는 어설픈 학생들의 공연 무대가 펼쳐진다. 매년 비슷한 공연인데도 관람하는 아이들과 학부모들의 박수 소리는 웃음 소리와 더불어 무척 크다. 물론 TV에서 방영하는 대형 교회나 대학교에서 주최하는 행사는 경건한 모양새를 제대로 갖추고 있어 아주 멋지다.

행사가 끝난 뒤, 각자 반에 모인 아이들은 집에서 마련해 온 루시아 먹거리를 나눈다. 우리에게 설날에 떡국이 있고, 추석에 송편이 있듯 이들에게도 ‘루시아의 날’에도 전통적인 먹거리가 있다. 생강과자와 루시아 빵, 샤프란 빵, 아몬드와 건포도를 넣은 ‘글뢱(Glögg 데운 포도주)’, 그리고 ‘율무스트(Julmust)’라 불리는 콜라 비슷한 크리스마스 음료 등이 그것이다. 생강과자는 평소에도 마트에 진열되지만 루시아빵은 딱 요즘 시즌에만 구워 판다.

스웨덴의 겨울 풍경! 12월이 되어 거리에서 생강빵 향기가 무르익고, 루시아빵이 빵집 진열대 위에 오르면 사람들은 창문을 아름다운 성탄 장식 전구로 치장한다. 아주 오래 전에는 생존을 위협했던 ‘어둠과 추위’가 이제는 집 밖에 존재하는 타인이 되고, 집 안에는 촛불 켜진 식탁을 둘러싼 ‘따뜻함과 포근함’이 가족처럼 상주한다. 시절이 무척 좋아졌다!

스웨덴 달력에서 루시아가 처음 발견된 것은 스웨덴이 여전히 카톨릭 국가였던 1470년대 초반이다. 꽤나 험난한 스웨덴의 종교변천사 속에서, 카톨릭 성녀인 루시아를 기념하는 날은 종교개혁의 거세고 혹독한 바람에도 살아 남았다. 종교 개혁 이후 스웨덴에서는 카톨릭 관련 서적만 소유해도 가혹한 벌을 받거나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정도였는데, ‘빛에 대한 사람들의 갈망’ 담은 루시아의 전통은 종교를 뛰어 넘어 사라지지 않았고, 20세기에 접어 들면서는 덴마크, 노르웨이 핀란드 등 다른 북유럽 국가까지 전해졌다.

옛날 사람들은 어쩌면 추위보다 어두움이 더 무서웠을 지 모른다. 추위는 겹겹이 껴입는 것으로 막을 수 있지만,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이나 사물로부터도 나를 고립시키는 것이 바로 어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색찬란한 불빛으로 밤도 대낮처럼 밝은 지금, 우리는 더 이상 이런 물리적인 어둠을 무서워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도 루시아 소녀는 매년 가녀린 촛불을 머리에 이고 경건하게 등장한다. 무엇을 밝히고자 함인가? 밤의 어둠은 사라졌으나 우리에겐 낮과 밤의 구분 없이 상존하는 어둠이 있다. 인간의 탐욕과 무지에서 비롯된 이 어둠은 여하한 불빛으로도 걷어내기 어려운 끈적이는 속성을 지녔다. 그리고 이 어둠은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이라면, 다소의 명암과 질감의 차이가 있을 뿐 어디에나 존재한다. 밤도 대낮 같이 밝은 오늘, 루시아 소녀의 촛불은 이 끈적이는 어둠에 빛을 던지기를……

2016년 겨울, 나는 수백만 명의 루시아 소녀들을 대한민국에서 보았다! 그런데 그 수백만의 촛불로도 걷어내지 못하는 ‘지독히도 끈적이는 어둠’이 한반도를 덮고 있다. 알고도 모르고, 하고도 하지 않았다는 뻔뻔한 거짓말들이 달라붙어 만드는 지독히도 끈적이는 어둠! 대체 이 어둠을 걷어내려면 어떤 빛을 들이대야 하는가? 태양이라도 끌어 와야 한단 말인가?

나승위  swnah201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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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승위 / 작가 swnah2013@gmail.com
작가 스웨덴 말뫼 거주
저서 : 삐삐와 닐스의 나라를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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