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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속으로 떠나는 여행

이 땅, 어느 계절인들 아름답지 않을까요. 하지만 사람마다 좋아하는 계절은 조금씩 다르기 마련입니다. 저는 가을을 유난히 사랑합니다. 저만치 물러나 유리처럼 맑고 투명해지는 하늘과 짙푸르게 여위어가는 강물, 그리고 이별을 앞둔 나무들이 보여주는 처연한 아름다움은 오로지 가을에만 누릴 수 있는 풍경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가을에 가장 아름다운 것은 따로 있습니다. 대지 위에 집 위에, 그리고 사람 위에 체로 친 듯 곱게 내리는 햇살입니다. 마치 비단실이 나풀거리며 내려오듯 세상을 부드럽게 감싸는 황금빛 향연. 그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 몽환의 세상에 들어선 듯, 잠시 황홀해지기도 합니다.

오늘도 그 햇살을 가득 받으며 가을 속으로 여행을 떠납니다. 버스를 타고 시내로 가는 길이지만, 저는 그 역시 여행이라고 부릅니다. 학교에서 강의를 할 때도 늘 그렇게 말합니다. 문밖으로 나서는 순간, 여행은 시작된다고. 그렇게 생각하면 아무리 막히는 길도 지루하지 않습니다. 순간순간의 풍경이 아름답습니다. 어떻게 세상을 사느냐보다는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느냐가, 행복을 가름하기 마련이니까요.

유심한 눈으로 버스 차창 밖 세상을 바라봅니다. 여행자의 눈은 조금 깊어야 합니다. 무엇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세심한 시선이 필요합니다. 한낮은 역시 노란 햇살 속에 들어있습니다. 여름 내내 쏟아져 내리던 잘 벼린 창날 같은 햇살이 아닙니다. 사자의 이빨처럼 사납지도 않습니다. 눈이 가느스름해지고 입가에는 미소가 떠오릅니다.

정류장에 선 버스가 한참 멈칫거립니다. 무슨 일이지? 운전사가 급히 운전석을 빠져나옵니다. 그리고 잠시 뒤 앞문으로 무언가 끌고 올라옵니다. 유모차입니다. 아이가 잠들어 있는 유모차. 보통의 유모차보다는 커서 무척 무거워 보입니다. 어느 젊은 엄마가 아이를 태운 채 들고 오르려다가 실패하는 바람에 운전사의 도움을 받은 것이겠지요. 운전사가 끌고 젊은 엄마가 밀어서 유모차는 무사히 버스에 올라옵니다.

사실 새삼스럽게 거론할 만한 특별한 풍경은 아닙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누구라도 도와야 했을 테니까요. 하지만 또 그리 가볍게 볼 수 있는 풍경도 아닙니다. 제법 연세가 있어 보이는 운전사의 얼굴에 미소가 떠나지 않았으니까요. 승객이 벨을 미리 누르지 않았다고 짜증을 부리거나 소리를 지르는 운전사도 없지 않은 세상에, 차를 멈추고 유모차를 끙끙거리며 끌어올리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 모습을 보는 건 그리 흔하지 않지요.

버스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도심을 달립니다. 제 시선은 여전히 버스 안과 버스 밖을 오가며 여행의 행복을 만끽합니다. 어느 정류장에 버스가 서자 할머니 한 분이 서둘러 내립니다. 그리 바쁠 것도 없어 보이는데 왜 저러시지? 이유는 금세 확인됩니다. 할머니는 뒤에 내리는 할아버지를 기다리다가 얼른 손을 잡아 부축합니다. 누가 봐도 두 분은 해로한 부부입니다. 조금 더 힘이 남은 아내가 먼저 내려서 나중에 내려오는 남편을 부축하는 것이지요. 할아버지 역시 부축을 당할 만큼 노쇠해 보이지는 않지만, 손을 내미는 아내에게 슬그머니 손을 맡깁니다.

저는 할머니의 표정에서 미처 입 밖으로 내지 않은 말을 읽습니다. “당신이 평생 가족을 부양했으니 이젠 제 차례유.” 신뢰가 듬뿍 들어있는 미소가 뒤를 따릅니다. 제 기분이 좋아진 것은 최근에 쏟아져 나오는 ‘황혼이혼 급증’이니 ‘노인 자살’이니 하는 뉴스 때문만은 아닙니다. 풍경 자체가 주는 아름다움 때문입니다. 마주 보며 잠시 미소를 나누던 두 분이 천천히 걸어 인파 속으로 묻힙니다. 그 뒤로 선물처럼 가을햇살이 내립니다. 세상은 여전히 아름답습니다. 저는 행복해집니다. 그 행복 위에 슬그머니 짧은 시 하나 얹어봅니다.

가을나무 잎새 떨구듯
평생 배운 수식어 하나씩 버리고 나니
앙상하게 남는 한 마디
사랑해!
저 잎 다 지기 전에 돌아가야겠다
(졸시 ‘단풍들다’ 전문)

제 뇌리에 이 시가 떠오른 건, 시 속에 있는 ‘사랑해!’라는 말 때문이었을 겁니다. 버스운전사가 보여준 따뜻한 미소나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서로 부축하는 손길이 바로 사랑이었으니까요. 사실 따지고 보면 이 냉혹하고 험한 세상을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처방전이 사랑이지요. 우리가 안고 있는 갈등과 대부분의 문제는 사랑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게 제 믿음입니다. 사랑으로 서로를 위로하고, 부축하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지요. 어차피 누구도 혼자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니까요. 아무리 강해 보이는 사람도 부축을 받아야 할 날이 올 테니까요.

사랑은 준비된 이에게만 깃듭니다. 넓은 품에서만 부지런히 키를 키웁니다. 이 가을에는 가슴을 활짝 열고 사랑자리 하나 마련할 일입니다. 계절의 조락(凋落)까지도 쓸쓸함보다는 행복으로 맞이할 일입니다. 이별조차 사랑의 과정이니까요.

길 위에서 만나는 누구에게라도 고맙다고 인사하고 싶은 가을 한낮, 제 여행은 계속 됩니다.


글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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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준  sagang@mediasoo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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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준 /시인.여행작가.칼럼리스트 sagang@mediasoom.co.kr
<사라져가는 것들 잊혀져가는 것들><클레오파트라가 사랑한 지중해를 걷다><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안부><자작나무 숲으로 간 당신에게> <나를 치유하는 여행> 등의 여행서, 산문집과 캘리그래피 시집 <사랑은 저 홀로 아름답고>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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