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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 읽는 글] 어머니의 젓가락

“이렇게 아파보기는 생전 처음이다.”

전화기 저쪽, 어머니의 목소리는 파밭에 내린 서리처럼 낯설고도 익숙합니다. 당신은 처음이라고 하지만 어머니는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환절기 앓이’를 거르지 않았습니다. 새로 얻거나 기억하는 것보다 잃거나 잊어버리는 게 더 많은 시간을 살아갈 뿐입니다.

따로 떨어져 사니, 이런 날은 일부러 찾아뵐 수밖에 없습니다. 죽 전문점에 들러 전복죽 하나를 삽니다. 버스를 타고 가는 내내 죽이 담긴 봉지를 가슴에 당겨 안습니다. 제 심장의 온기가 죽에 고스란히 전해지면 좋겠다는 마음을 담지만, 저는 죽으로부터 온기를 얻을 뿐입니다.

어머니. 길 위를 떠도느라 모처럼 들른 아들이 섭섭할 법 한데 한 올의 원망도 없습니다. 끙끙 앓던 몸을 끌고 마중을 나오십니다. 낮에 병원에 다녀와서인지 움직이는 게 조금 나아진 듯합니다. 생각보다 죽을 맛있게 드십니다. 노인들이야 먹는 게 힘의 원천이니 걱정이 조금 덜어집니다. 이 얘기 저 얘기가 이어집니다. 하루 종일 빈집을 지키려니 사람이 그리웠던 게지요. 저녁을 먹고 가라십니다. 원래 늦게 먹으니 아직 멀었다고 손사래를 쳐도 막무가냅니다.

“내가 정신이 아직 이렇게 멀쩡한데 몸 좀 아프다고 아들 밥 한 끼 못 차려주겠냐?”

이런 땐 초등학교 1학년짜리가 6학년 시험지를 받은 듯 막막합니다. 제가 차려먹겠다고 해도, 주방에 들어가는 걸 한사코 말립니다. 노인이 힘들게 차린 밥, 맛있게 먹는 게 보답이라는 것쯤은 압니다. 큰 그릇을 가져다 이것저것 넣고 비빈 다음 우걱우걱 입에 밀어 넣습니다. 당신 얼굴이 비 갠 오후처럼 환하게 빛납니다. 목소리에도 생기가 돋습니다. 자식 나이가 50이 넘었는데도 입에 밥 들어가는 건 여전히 행복인 모양입니다.

김치를 집다가 흠칫, 젓가락을 가립니다. 툭! 하고 심장이 내려앉는 소리가 들립니다. 제가 쥔 젓가락이 짝짝이입니다. 그것도 한쪽이 심하게 짧습니다. 모양도 영 다릅니다. 생전 처음 있는 일입니다. 결벽증이 염려될 정도로 깔끔하게 살아온 당신, 얼마 전까지도 짝짝이 젓가락을 아들 손에 쥐어준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입니다. 성격상 단순 실수일 리는 없습니다. 혹시 눈치 채실까 허둥대다 보니 젓가락질이 엉망입니다. 멋쩍은 웃음과 함께 슬그머니 당신의 손을 잡습니다. 소나무등걸 같은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안심합니다.

어긋난 젓가락, 어긋난 어머니의 세월이겠지요. 나이에 키를 맞추지 못하고 작아만 지는 심신. 이젠 어떤 의사도 고칠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가슴에 새로운 강 하나가 울컥울컥 흐릅니다. 앞으로 가는 법만 아는 시간은 이 어긋남에 더욱 채찍질을 하겠지요. 밥상 앞에 앉아 어머니의 한마디 한마디에 과장스러울 정도로 크게 웃습니다. 일부러 껄껄대고 웃습니다. 험한 세상 살아오면서 가장 완벽하게 배운 것은 가슴으로 울고 얼굴로 웃는 것입니다.



글쓴이

이호준  sagang@mediasoo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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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준 /시인.여행작가.칼럼리스트 sagang@mediasoom.co.kr
<사라져가는 것들 잊혀져가는 것들><클레오파트라가 사랑한 지중해를 걷다><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안부><자작나무 숲으로 간 당신에게> <나를 치유하는 여행> 등의 여행서, 산문집과 캘리그래피 시집 <사랑은 저 홀로 아름답고>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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